[성명] 진리에 빛이 있으라

진리에 빛이 있으라

9월 30일 ‘진정한 인권’을 위한다는 서울대인들은 ‘평등권’을 포함한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안)과 대학원생 인권지침(안)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걸었다. 그리고는 비서울대인 국민을 포함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위의 규범들이 제정될 경우 다른 대학들에도 유사한 규정이 제정될 것”이며,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도 더욱 용이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돼 그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 사는 데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나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 나의 삶이 나를 옥죄는 나날도, 내가 나라는 사실이 나의 오늘과 내일을 무너뜨릴까봐 몇몇 꿈들을 접는 절망적 상황을 더 이상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 2017년,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상사에게 ‘교정 강간’을 당한 해군의 이야기에 몇몇 동료들은 군인의 꿈을 접었고 올겨울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합격생이 거센 혐오에 입학을 포기했을 때 어떤 동료들은 그녀와 함께 꿈을 접었다. 그녀의 탓도, 우리의 탓도, 조금 더 자주 좌절하고 슬퍼해야 했던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대학에서 포괄적인 평등권을 보장하는 명문화된 규정이 제정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곧 퀴어-페미니즘 세미나를 진행하려다 퇴학에 맞먹는 징계를 받아야했고 일부 혐오세력의 테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동아리방의 명찰을 떼야 했던 성소수자들을, 칼로 난도질당한 신입생 환영 현수막에 환영받지 못했던 성소수자 신입생들을. 그리고 학문과 연구에 임함에 있어 자신의 삶과 양심과 사랑하는 동료들을 잠시 외면하며 나를 숨길 때 버거운 죄책감에 짓눌리던 모든 이들이 온전히 삶과 진리의 벅찬 감동을 향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제가 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적 권리를 담은 인권헌장이 제정될 때에야 모든 학문공동체는 자유 앞에 모두가 평등한 담론의 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권의 이름으로 혐오를 포장하는 그대여. 그대는 두려운가.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운가. '동성애는 일루미나티의 계획이다' 따위의 가당치 않은 말로는 이미 전체학생총회에서 구 인권가이드라인 최종안을 의결했을 정도로 인권에 대한 의식이 재고된 서울대학교 학생사회를 현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이제야 깨달았는가. 그래서 평등을 위한 전세계적 해방의 물결을 '문화 사대주의'라는 후미진 오명으로 깎아내려서라도 진정한 자유를 위한 평등에의 도약을 저지하려는 것인가.

서울대학교는 참된 지성으로 시대적 압박과 아둔한 일부의 퇴행을 타파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부르짖어야 하는 학문의, 대학의, 그리고 관악의 근원적 숙명을 마주하라. 그리고 더 나은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라. 그 언젠가 억압과 박해에 반해 학문의 양심과 자유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던 학생들이 그러했듯, 우리는 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연대할 것이다. 모두를 위한 새로운 시대의 호명, 그것만이 대학이 추구해야할 진리요, 혐오와 폭력의 시대에 항거와 투쟁의 역사를 써온 우리를 인도한 유일한 빛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적·범인류적 소명을 다할 때에야 서울대학교가 추구한다는 진리에는 가히 빛이 있으리라.


2020년 10월 07일
대학·청년성소수자모임연대 QU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