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성명, 논평, 발언문

[QUV 성명] "나는 모두가 화나서 고래고래 지르는 그 고함 속에 있을 겁니다."

“나는 모두가 화나서 고래고래 지르는
그 고함 속에 있을 겁니다.”

- 무지개 농성단의 승리와 남은 과제를 돌아보며 -




그 감정의 이름

대학생이 언제부턴가 개새끼가 되었다. 투표하지 않고, 부정의에 대항하지 않는다. 꿈이 7급 공무원이라니,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등짝을 두들겨 맞는다.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에도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히 체화한 이기주의자가 되었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에 모인 이들은 그런 대학 성소수자들이다. 이 안에는 모임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고, 성소수자 차별과 맞서는 투쟁의 맨 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QUV는 그 모든 고민을 함께하기 위한 곳이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혐오세력이 난동을 부리고 서울시가 제정위원회를 방해하며 헌장을 폐기하려 들었을 때 우리는 슬픔을 말했던 것 같다. 이렇게도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 존재를 굳이 확인받는 과정이 이토록 지난한 게 암담하고 답답했다. 충격을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전직 인권변호사 박원순 시장의 변절이 충격적이었고, 혐오의 거센 기세가 또한 그랬다. 무언가 더 있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는. 슬픔도 충격도 아닌 이 불규칙한 심장의 박동은 무엇인가. 12월 6일 무지개 농성단이 박 시장을 규탄하며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불현듯 떠올랐다. 이 감정의 이름은 분노였다. 우리는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시청에서 만났다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점거 전 QUV는 이례적으로 기민하게 각 대학 내에 인권헌장 사태를 알리는 대자보를 게시한 바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많지 않아 보였다. 상황은 급변하고, 무지개 농성단에 몇 차례 위기도 닥쳤다. SNS로 그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졌을 때 우리는 당황했다. 존재를 숨긴 채 이중의 정체성을 수행하는 자신이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성소수자가 얼굴을 드러낸 채 자신의 권리를 위해 농성을 한다는 사실이 초현실적이었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당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나선 QUV의 대학 성소수자들은 웹자보를 만들고, 해외에 이 상황을 알리기 위한 번역을 도왔다. 누군가 시험기간의 잠을 줄여 그렇게 일을 돕는 동안,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던 이들은 하나둘씩 시청으로 모여들었다. 시청 로비에서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서로 시험이 몇 개 남았는지 묻고, 앞으로 남은 과제로 지새울 밤이 얼마나 끔찍할지 한탄하면서도 웃었다. 시작할 때만 해도 그대로 질질 끌려나갈 것을 각오했다던 무지개 농성단에 보편적 인권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성소수자들이 수백 명 모여든 가운데, QUV도 그 곳에 있었다. 우리는 종로나 홍대나 동아리방이 아닌, 서울시청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성소수자로서 만났다. 생경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확인한 것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간을 보다 결국 예정된 헌장의 선포일이었던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 당일에 무지개 농성단 대표들을 면담했다. 시장은 페이스북에서는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 같이, 대표단에게는 조금 더 분명하게 사과했다. 헌장은 선포되지 않았지만, 향후 진정성 있는 대처를 약속한 시장을 지켜볼 것을 다짐하며 농성단은 해산했다.


해산하던 날의 문화제는 대단했다. 탁 트인 로비에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를 포함한 수백 명이 하나같이 무지개 손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드디어 얼굴을 당당히 들고 혐오를 상대하였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승리의 요체는 거기 있었다. 반쪽짜리 사과나 시장의 참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소수자에게도 얼굴이 생겼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고 싶어 했던 시장조차 그 얼굴을 바라보고 사과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소수자들은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인권이 여기 있다”고 선언한다. 성소수자가 얼굴과 육신을 지닌 시민의 한 사람이자 그들을 대표하여 시청에 서 있다는 것, 대학 성소수자들이 그 자리에서 해후했다는 것, 그것은 선포해야만 하는 큰 성과였다.


그렇게 농성은 종료되었고, 부산한 일상이 다시 찾아왔다. 이 싸움이 얻은 것 없이 끝나버리지 않았냐는 우려가 있다. 구체적인 약속 없이 물러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옳은 의견이기에, 농성의 종료와 별개로 싸움은 끝나서도, 우리는 물러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도 혐오는 침탈을 시도할 것이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은근슬쩍 소거하려는 시도가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용감한 영웅도, 정의의 사도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개 농성장에서 우리에게도 분노가, 해후하는 얼굴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이 분노가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날 대학 성소수자들 또한 그 고함 속에 당당히 존재할 것이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는 이를 우리의 승리로 이름하며, 앞으로도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에 당당히 맞설 뿐이다. 승리를 축하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2014. 12. 15.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