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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V 활동/대학별 릴레이글

큐브 릴레이 연재 2월호 - 성균관대학교 편

성균관대학교 성소수자모임 퀴어홀릭 - 모니터속그녀는내게스키데스말해주지

 

 

 

찌질의 역사

 

최근 우리모임에서는 회지 작업을 하였다. 회지에 낼 글을 쓸 시점의 나는 여러모로 화가 많이 나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는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 탓이다라는 엄청난 글을 써냈다. 사실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으나, 화가 나서 쓴 탓이었는지 원고는 일필휘지 완성되어버렸고 일이 바빠 쓰려던 이야기는 결국 맘속에 묻혀버렸다. 사실 너무 식상해서 못 쓴 거지만, 마침 멍석이 깔리는 귀중한 기회가 왔으니 그때 묻은 이야기를 써본다.

나는 중고등학교 모두 여학교를 졸업했다. 전학을 한 번 했으니 총 세 개의 여학교를 다닌 셈인데, 첫 번째 학교는 치맛바람이 워낙 심했던 탓인지 아이들 모두 순진해 빠진 학교였다.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 나가서 땅따먹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학교는 치맛바람은커녕 툭하면 경찰차가 교문 앞에 서있는 거친 학교였다. 처음 전학을 간 날 여러모로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발목양말을 처음 봤고, 수업시간에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레즈비언을 처음 봤다. 그리고 세 번째 학교를 가는 시점에서 나는 레즈비언이 되어 있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두 번째 학교에서 친구들이 별로 개의치 않으며 남자와 사귀기도 하고 여자와 사귀기도 하고 하는 모습을 보고 이럴 수도 있구나 했을 뿐이었다. 세 번째 여학교도 비슷했다. 다들 누가 레즈비언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할 뿐이었고 사립학교였던 까닭인지 오래 근무한 선생님들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19살을 보내고 20살을 맞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을 입학했을 때 여느 새내기가 그렇듯 나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새터를 향해 가는 버스 속에서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의 얼굴을 보며 이들이 나와 함께 4년을 보낼 선배들과 친구들이구나 생각하며 연신 즐거워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아침, 이불을 개다 아웃팅을 당했다. 당한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내 머리가 단발보다도 짧았고, 동기 여자아이들이 유난히 나를 귀여워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학번도 기억 안 나는 웬 남자선배가 소파에 앉아 이불을 개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 여고에 많은 그런 거 아냐? 레즈비언. ”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 별 말을 못 하고 서둘러 이불을 개고 나를 유난히 예뻐하던 동기를 찾아 도망갔다. 동성애라는 것이 남의 눈에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안 첫 번째 기억이었다.

그 후 나는 삼 년을 우울해 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나를 못 견디게 했다. 견딜 수 없어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할수록 느끼는 것은 동성애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보통의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평범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이다지도 어려운가 나는 왜 레즈비언인가. 고민할수록 답이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선배의 말 이후로 나는 머리를 자르지 못 했다. 과 생활은 두 달 만에 포기 했다. 이성애자 선배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 사이에 낄 수 없다는 절망감만을 느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어느 때부턴가 나는 주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커밍아웃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레즈비언이야. 나의 정체성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너무 커지자 그걸 견딜 수 없어 누구에게든 인정받으려 부던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같은 레즈비언을 절대로 만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학교 모임에 꾸준히 나가며 게이인 동기와 선배들하고만 어울리고(하필 우리모임은 내가 가입한 이후 몇 년간 여자회원이 나뿐이었다), 학교생활 중 마주치는 이성애자인 사람들에게는 모두 커밍아웃을 하면서 정작 레즈비언 커뮤니티 등에는 절대로 발을 안 들였다. 막연하게 레즈비언이 무서워서 만날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누군가를 만나 나를 인정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나는 점점 더 이성애자 사회에 섞이지도, 성소수자 사회에 섞이지도 못한 채 붕 떠올라 그저 부유했다. 나중에 가서는 나도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나를 간파한 어느 친구는 진지하게 너 실버타운에서 뽀삐랑 늙어죽을 거야? 일단 만나나봐.”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말한 친구는 커밍아웃을 하자 울면서 왜 하필 동성애자인 거냐고 말하던 친구였다.

정체성을 마침내 인정하고 행복한 레즈비언 라이프(?)를 즐기게 되기까지 나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았다. 인정하게 된 계기는 욕을 한바가지 먹을 일이지만, 남자와의 연애였다. 마지막까지 나를 지탱하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양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그래서 3학년이 된 어느 날 나는 내가 좋다고 하는 어떤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딱 2주 후, 학교 모임 선배에게 못 견디겠다고 털어놓았다. 나를 너무나 배려하고 공주처럼 대접해주는 좋은 남자였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툭 하면 휴대전화를 끄고 잠적하기 일쑤였고 매번 도망 다녔다. 그가 베푸는 호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날 지탱해주던 그 혹시나 하던 기대도 꺾였다. 횡설수설하던 내게 선배는 네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만 생각해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나는 내 잘못을 깨달았다. 나는 그 길로 남자에게 이별을 고했고, 귀동냥으로 들은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찾아 가입했다. 행복해지고 싶은 나를 나는 너무나 오래 방치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긴 연애를 두 번 했고 허리까지 길렀던 머리를 과감히 숏컷으로 자르기도 했고 종국엔 모임 회장을 맡았다. 그렇게나 가기를 무서워했던 레즈비언 업소는 처음 간 이후 오히려 특수한 조건의 공간이 주는 묘한 동질감에 중독되어 한동안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물론 소위 오픈게이가 되어 망아지처럼 날뛰는 중에 겪은 일들도 한두 일이 아니지만, 20대 초반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 그 감정들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왜 그렇게나 인정하지 못 하고, 나를 불행하게 하려고 애썼을까. 생각 없이 잡은 냄비 손잡이가 너무 뜨거워 기겁한 채 그저 냄비가 타버릴 때까지 내 손만 보며 발 동동 구르는 꼴이었던 그때 그 기억들은 모순과 궤변으로 얼룩져있다. 그러나 아마도 내 기억과 경험과 감정들은 비단 나만이 겪은 것들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무언가가 사실은 다른 세상에서는 너무나 이상하고 아연실색할 무언가가 되어버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경험.

이런 경험을 하게 된, , 했던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뭐든 당신 잘못이 아니니, 당신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을 찾읍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