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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V 활동/대학별 릴레이글

[QUV 릴레이 성명] 다시 만난 우리의-포괄적 차별금지법 발의를 환영하며-

[QUV 릴레이 성명] 다시 만난 우리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발의를 환영하며-

차별금지법의 발의라는 유의미한 세대의 부름을 마주하며 우리의 몸과 삶의 궤적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세계와 세기의 사람들이 걸어온 길을 본다. 유구한 혐오의 역사 아래서 우리는 온몸으로 연대했고, 분리와 배제 너머의 삶을 이야기했으며, 국가와 효율과 합의라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식들을 익혀왔다. 그렇게 차별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유무형의 무엇인가를 함께 견뎌온 우리는 숨과 같은 동료를 얻었고 연대의 가치를 배웠으며 ‘프라이드’로 빛났다.

그러나 우리는 유약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동료들을 잃었고, 누군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절망을 겪었으며, 조금 더 자주 무너졌다. 우리는 강해져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퀴어라는 이름에 자긍심을 불어넣었지만 자긍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삶의 장면이 존재했다. 퀴어문화축제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온갖 무지개 굿즈들을 가방에 욱여넣을 때의 당혹감과 손주는 봐 줄 테니 빨리 국수나 먹게 해달라는 가족의 애정 어린 핀잔을 들을 때 입안에 느껴지던 씁쓸함. 성소수자도 우리의 이웃이니 감싸줘야 한다는 온화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의 아득함. 프라이드는 우리가 직접적인 폭력을 살아내는 방식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의 모든 순간 우리를 구원하진 못했다. ‘프라이드’라는 말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장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에 더 이상 우리에게 ‘자긍심’을 건네지 말라. 우리는 특출난 자긍심도 투쟁도 필요 없는, 구태여 생존이라는 말로 수식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그린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분명 그러한 일상의 시작일 것이다. 불합리한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말. 환대도 특혜도 바라지도 않으니 아주 보통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말. 이 당연한 말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차별의 금지를 논하는 장에서마저 특정 정체성에 대한 배제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누구보다도 광장을 떠나고자 하는 우리는 오늘도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정치의 장에 호명되고야 말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되고 그에 대한 본격적 입법 절차를 앞둔 오늘날의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의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차별과 혐오와 폭력의 역사를 넘어 생존과 생존 이상의 위대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혐오의 논리를 직면하였다. 차별해도 되는, 차별할만한 인물군을 공인하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성립 불가능한 표현은 단지 맹렬히 혐오하며 차별하겠다는 수치스러운 선언에 불과하다. 21대 국회는 열렬한 혐오의 목소리에 굴하고 말 것인가, 혹은 시대와 인간에의 소명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온화한 사랑의 시대를 호명하는 숭고한 도약에 함께할 것인가.
그대가 시대와 세계의 아픔에 잠 못 이룬 경험이 있는 자라면, 그대가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자라면, 그대가 사랑을 믿는 자라면, 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라.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그릴 수 있는 세계를 개진해가자.

그 무엇보다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발의를 온몸으로 환영한다.
이 길 위의 모든 동료들에게 한없는 연대와 지지의 인사를 건네며 글을 줄인다.

2020년 7월 15일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ueer in SNU x 대학·청년성소수자모임연대 QU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