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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V 활동/대학별 릴레이글

큐브 릴레이 연재 9월호 - 연세대학교 편

안녕하세요 연세대학교 컴투게더 회원인 눈썹달입니다. 한양대 하이퀴어 회장에 의해 큐브 최초로 저자까지 저격당하여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전 일을 미루려면 확실히 미루고 하려면 당장 해버리는 타입이라 바로바로 써버렸습니다. 저격한 사람에 대한 복수심을 가득담아 쓴 글이니 허접하더라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割來(할래)

 

 나는 그이 집에서 자고 일주일 넘게 열에 들떴다. 볼은 언제나 발그레했고 몸은 줄곧 녹초가 되곤 했다. 정신도 곧잘 아득했다. 그러다가 그날 이후 별안간 모든 게 공허해지고 기운이 쭉 빠져나가 몸을 못가누어 버렸다. 그러니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내가 강의를 빠지고 점심을 포기한 채 40원을 들고 큰 맘 먹고 창경원에 놀러갔을 때부터이지 싶다. 그날 벚나무 꽃잎이 푹푹 나렸다. 내가 열하나 적에, 고향 누이가 열여섯 생일에 해 입던 연분홍치마 빛깔이 너무나도 고와 그렇게 용심이 폭폭 났었는데 벚꽃 낙화는 그보다 더 고운 자태였다. 그러나 해진 구두 밑창 사이에 짓이겨진 벚꽃이 끼어 찌걱찌걱 떨어지질 않았다. 그게 난 너무 창피했고 그것이 병으로 도진 것이다. 도무지 말이 아니 되고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기를 맞추어 보자면 상당히 들어맞았다. 벚꽃은 썩었고 녹았고 말랐으며 해진 구두와 하나가 되었다. 내 속도 썩어 갔고 녹아갔고 말라갔지만 그이와 하나가 될 수는 없어 보였다. 그이는 결국 그렇게 창경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나는 취미를 하나 붙였다. 토요일 낮에 점심을 거른 채, 버스비마저 아까와서 신촌서 무교동까지 걸어와, 다방에서 30원짜리 뜨거운 커피를 시키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서울 올라올 때 이장 아들에게서 서너 번 입고 말았노라며 물려받은 코트를 입기에는 날이 많이 풀렸지만 이것 말고는 변변찮은 옷이 없어 그 토요일 날도 결국 그걸 걸치고 나와 다방 쇼파를 하나 차지하고서는 꼬박 두 시간 반을 때우고 있었다.

 “, 영원회귀란 결국 우리가 토요일마다 걷는 여정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어느 베레모를 쓴 사내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 상호 선배님. 웬 기척도 없이.” “왜 안했겠어. 다만 네가 너무 냉커피와 책 한 페이지에 20분을 집중하고 있기에.” “, 죄송해요, 선배님. 진짜 몰랐거든요.”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봄밤인데 좀이 쑤시지 않은가? 몇 시간째 앉아있는 거야? 시장하진 않아?” “아니오. , .” 상호 선배는 토요일마다 이곳 무교동 다방에서 만나는 고향 선배인데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중학생 1학년이고 그 선배가 고등학생 2학년 시절에 같이 문학 서클을 하며 친해졌으니 아마 임오년생인가 그랬다. 이후 계속 서신을 주고받다가 내가 전기대 붙고 나서 명동이며 무교동이며 소공동이며 종로며 같이 데리고 다녔더랬다. 이후 토요일이면 왕십리서 여기 무교동까지 버스를 타고 늘 등장하곤 했다. “동기 분들은 다 어디가시고요? 왜 벌써 오셨어요?” “? 일찍 오면 안 되나? 안 그래도 내 동무 하나를 데리고 왔어. 저기 다른 친구를 만났나 보이. 여봐. 호연이, 자네 뭐하는가? 이리 오라고.” 그 사내가 뒤를 돌아보더니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나 역시 잠깐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보았는데 별안간 심장이 멎을듯하였다. 나는 고향서 고등학교 2학년 되던 시절에 동무들과 함께 시내 극장 화장실 통풍구를 통해 몰래 잠입하여 <맨발의 청춘>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서두수 역을 맡은 신성일에게 홀딱 반하였다. 그런데 그 신성일을 닮은 훤칠한 미남자가 이리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하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마시다 남아 녹아버린 커피 잔을 못내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웬 수선인가? 간만에 만난 동무가 있어 반가이 인사 중이었구만. , 상호 자네 맞은편에 앉은 미소년자는 누구야?” “, , 인사해. 내 대학 동기 호연이야.” 나는 필시 상호 선배가 나를 부르는 것을 알았지만 굵직한 그분의 목소리까지 확인한 내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아니했고 나는 말을 버벅일 수밖에 없었다. “, 안녕하십니까. , 반갑습니다. 저는, 아 저기 뭐지.” “, 왜 이래? 쟤는 훈이라고 하는 애야. 연대 갓 들어온 신입생이지. 일전에 말했듯이 토요일마다 같이 청계천복개도로를 거니는 동무 같은 고등학교 후배지.” “,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호연이라고 합니다. 상호랑 같이 왕십리서 대학 다니고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산보와 토론을 좋아하여 두 사람 행렬에 동참코자 왔습니다.” “어때 훈? 이 친구랑 같이 가도 되지?” “, . 저는 조,좋아요.” 나는 대답 직후에 입에서 더운 김이 팍 나왔다. 이상했다. 분명 대학 와서 처음 맞는 봄이긴 하고 내가 좋아하는 다방이긴 하고 좋은 분위기이긴 하여 기분이 늘 좋긴 했다. 하지만 이건 이상했다. 필히 기분이 좋은 편인데 가슴이 진정이 안 되고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내가 대학을 붙었던들 이리 행복했었던가 싶었다

 우선 우리는 다방을 나왔다. 그리고 상호선배와 늘 자주 가던 선술집에 들어갔다진로소주와 참새구이를 시켰다. 나는 안주는 일체 손도 아니 댄 채 속을 진정시키려 취하고자 소주만 연신 들이켰다. “훈이씨는 술을 잘 하나 보군요?” 호연이라는 이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 아니오?” 당황한 탓에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어이쿠, 그렇다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까? 여보게 상호 자네 후배 저 친구 귀엽구만.” “놀리지 말아. 훈이 저 친구 성화가 나면 무서워.” 분명 다 큰 사내에게 귀엽다는 말은 놀리는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귀엽다는 말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살짝 작은 체격에 앳된 얼굴이라 그런 말을 들을 터이면 왠지 나를 얕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이가 말하는 것은 전혀 기분이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몽롱해졌다. 나는 본시 술을 마셔도 쉽게 티가 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훈이 자네 얼굴이 왜 이렇게 벌개져? 취했어?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상호 선배가 신기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 . 선배님 갑자기 덥네요. 날도 풀렸는데 코트를 껴입은 탓인가 봐요. 바깥바람 쐬고 싶어요.” “아 그럼 호연이, 우리 이제 슬슬 나가보려나?”

 처음 서울 올라와 신촌에 하숙을 잡고 짐을 풀었던 밤, 잠깐 바람 쐬러 밖에 나왔을 때의 그 밤공기는 그렇게 시릴 수가 없었다. 그 한기는 나를 위협하는 듯 온 몸 구석구석을 침투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이내 삼십 초를 못 견디고 방안으로 들어가곤 했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포근했다. 캄캄한데도 이 도시의 공기가 전혀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나는 끝내 코트를 벗어 팔에 걸고 무교동 사거리로 나왔다. 상호 선배와 호연씨도 밖에 함께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무작정 동대문 방면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상호 선배가 먼저 입을 떼었다. “, 또 치열했던 일주일을 지나 청계천복개도로를 걷는 시간이 돌아왔고만.” “한밤에 도심을 이렇게 무작정 걷는 건 또 오랜만이고만 그래.” 호연 선배가 화답했다. “훈이씨와 상호 자네는 둘이 무얼 얘기 했단 말이야?” 하고 덧붙여 물었다. “그냥 뭐. 얘기할 게 뭬 없겠어? 고등학교 시절 미친개 같았던 선생이나 양친들 근황이나 내 연애 이야기나 정세 이야기나 그런 시시한 것들이지. 훈이, 안 그런가?” “. 근데 저는 안 시시했어요. 외로운 서울에 그것도 남들 다 화려한 토요일에 선배님 없었으면 이런 게 다 가당키나 해요?” “나한테 그러지 말고 여자를 만나란 말이야. 외모도 반반한 친구가 왜 여태껏 애인이 없어. 이대도 가깝겠다. 소개도 많이 들어올 터인데.” “아직 관심 없어요, 선배.” “아직 그러한 가보네 훈이. 내 더는 말 안하겠네만 그래 뭐 다 이해하지.” “그러지 말고 봄밤공기나 맡아보지 우리. 난 꽃내음도 좋지만 밤 특유의 차분한 냄새가 좋아.” 호연씨의 말에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춘 채 밤내음을 맡으며 계속 걸었다. 그 걸음이 보신각 근방에 다다를 때쯤 갑자기 상호 선배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야. 승현이 이게 얼마만이야? 안암서 놀러왔나? 시험은 다 끝났단 말이야? 이야. 그랬구먼. 아참, 호연이랑 훈이 자네들끼리 걸어가겠는가? 난 저 친구랑 잠깐 회포를 풀어야해서.” “? 그래 그러게. 우리끼리 걷지.” 호연씨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였다. 나는 콩닥거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뭐라 말이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목청을 넘어가질 못했고 결국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어색해요? 훈이씨?” 먼저 말을 붙인 건 호연씨였다. “, 아니오. 그렇진 않은데 다만 제가 말을 먼저 걸긴 창피해서요.” “역시나 부끄럼 많이 타는 게 귀엽군요.” 나는 다시 심장이 쿵쿵거렸다. “,귀엽다는 말 하지 마세요. 저도 다 큰 남자인데.” “그랬군요. 다 큰 남자였군요. 몰랐네.”하면서 별안간 그가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였다. 술이 취한 듯 자연스러웠지만 나는 흠칫 놀라 몸이 움츠러 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걸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처음 가본 곳까지 이르렀을 때 갑자기 오른쪽에서 어깨가 축 처진, 꾀죄죄한 여학생 뻘 되는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왼쪽에서는 원피스를 입은 채 화장이 진한 여자들이 나왔다. “청계천은 참 신기하죠. 왼쪽에는 종삼이 있고 오른쪽에는 평화시장이 있고.” 호연씨가 말을 꺼내었다. 나는 처음 듣는 말이라 물었다. “그게 다 뭐하는 곳인가요?” “종삼 몰라요? 종로 3?” “.. 거기라면 일전에 방화 보러 낙원극장에 간 일은 있어요.” “물론 극장도 있지만 종삼은 그.. 홍등가요. 동양에서 제일로 크다는 홍등가 말이에요.” “, 아이쿠. 그렇군요.” 나는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다. “, 거북하오? 관심이 없어요?” “. 조금 그래요.” “허허. 오해 마세요. 홍등가 가자 그 말을 하고자 함은 아니었어요. 그냥 청계천 이곳이 기이한 곳이다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오른쪽 평화시장에는 소녀 여공들이 앞이 캄캄할 정도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주말도 없이 하루 14시간을 꼬박 미싱, 시다를 하며 허리도 못 편 채 고생을 해서 일을 하죠. 그걸로 돈을 번 자본가와 반장들은 청계천도로를 건너와 종로에서 술을 찐하게 마시고 옆에 종삼으로 넘어와 밤을 즐긴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돈은 다시 고스란히 포주에게로 가고 그 돈이 또 동맥혈마냥 전 사회에 퍼져나가요. 웃기지 않아요? 이곳 청계천에서 고생하는 것은 결국엔 다 여자요.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오. 그런데 그런 이들을 원동력으로 굴러가는 거대 도시가 바로 이곳 서울인 것 말이죠. 이게 우리 현재의 인간사고요.” 호연씨는 담담한 듯 끝까지 말을 이어나갔다. “.. 저는..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해봤지만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 아까는 오해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참을 듣다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아니에요. 그 반응이 충분히 있을 수 있죠. 그나저나 아까 상호랑 했던 얘기 말인데, 훈이씨는 아직 이성에 관심이 없으신가보던데.” “, . 그냥 아직은 좀 그래요.” “그럼 저는 어떠십니까?” “?” 나는 정말 큰소리로 화들짝 놀랐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쿠, 눈이 토끼눈이 되었네요.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하. 진짜 귀엽네요.”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뒤이어 노기 띤 목소리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런 식으로 초면인 사람을 놀려먹는 데 취미 붙이셨나보군요.” 호연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아닙니다. , 그런 거 아니었는데, 아 정말 미안합니다.” “...” 그와 나는 어색함이 감도는 가운데 청계천도로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나갔다. 그리고 곧 동대문이 나왔다. 나는 술이 아주 조금은 깨는 듯했지만 발이 너무 피곤하였다. 그리고 가방에서 시계를 꺼내보았다. , 벌써 밤 1120분이다. 큰일이 났다. 이미 버스며 전차며 죄다 끊겼고 곧 있으면 통금 사이렌이 울릴 시간이었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른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했다. 호연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 아까 일은 진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지금 보아하니 버스 시간도 다 끝난 듯 한데 집이 신촌이지요?” 나는 네에..”하고 대답하였다. “저 그럼 제가 사는 집이 요 앞 창신동인데 제 방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가시는 게.” 나는 어찌할 수 없어(당시엔 기쁜 마음이 앞서지는 않았다.) 그러자고 하였다. 동대문을 지나 우리는 인적이 드문 길을 계속 걸어갔다.

 “아까 장난으로 말한 거 미안합니다. 그런데, 진짜 저 어떠십니까?” 동대문을 지난 지 3분 정도 만에 다시 호연씨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또다시 놀랐으나 차근차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저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 좋은 분인 거 같아요. 정말 너무 호남형이시고 말씀도 잘하시는 것 같고. 활발하신 것 같고. 여성분들한테 인기가 많으실 거 같고요.” “그렇군요. 사실 난 훈이씨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이건 나도 처음 겪어보는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슴에서 자꾸만 열이 나고요. 사실 무슨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여태까지 훈이씨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긴장도 되고요. 이런 말하면 제가 미친 놈 같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첫눈에 반했습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숨이 막혔다. “혹시 시간되신다면 다음 주 일요일에 저랑 같이 창경원에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잠깐의 정적을 깨고 다시 훅하고 들어온 건 호연씨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카바이드 등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눈앞에는 오로지 호연씨 얼굴 하나만이 보였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네에.. 그리고.. 저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자 호연이 형은 말없이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