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QUV 활동/대학별 릴레이글

큐브 릴레이 연재 10월호 - 홍익대학교 편

<만 게이에게 고하노니 사랑하며 살지어다>


LTR(Long Term Relationship)이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듣는다. 굳이 우리 말로 풀이를 해보자면 ‘장기연애’가 될 


터인데, 대체 ‘장기’라는 기간은 얼마만큼인 걸까? 육 개월? 일 년? 어쩌면 이 년? 혹자에겐 삼 개월도 충분할는지 


모른다. 쨌든 이런 장기연애가 게이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많은 이들이 장기간의 연애를 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를 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내 주변의 경우만 보더라도, LTR커플은 


LTR에 대한 갈망의 정도만큼이나 드물다.


영원한 사랑을 믿지는 못할지언정 그것을 원하지 않을 용감한 이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필자도 어언 5년 


전 새내기로서의 순진한 나날을 보낼 때에는 영원한 사랑, 평생에 걸친 연애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그는 나를 그 자체로 오롯이 사랑하면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로맨틱한 꿈! 그렇다. 필자는 정말로 


LTR을 원하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의 레이스 위를 달리던 순진한 내게 어린 날의 험난한 시련들은 기어코 제동을 


걸었다. 팔랑팔랑 달리기를 멈추고 직시한 현실은 그다지 장밋빛이 아니었다.


파편적인 관계가 지나칠 적마다 마음 어딘가를 스치는 크고 적은 자괴감을 한 번쯤은 느껴본 적 있으리라. 짧은 


연애만 반복하는 나는 과연 연애무능력자인가? 이렇게 혼자 쓸쓸하고 처량하게 늙다가 부지불식간에 고독사하면 


어쩌지? 죽은 지 일 년 만에 사회복지사에게 백골로 발견된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대체 왜 오래 사랑하지 


못하는가!


진정하고, 가련한 게이들을 위해 변명부터 늘어놓고 시작하자. 첫째로, 한국은 너무 좁다. 내가 아는 한 게이는 


광활한 호주 땅에서 유학 생활 중이다. 땅이 넓은 만큼 게이도 많겠거니 싶지만, 한국에 비해 인구밀도가 굉장히 


낮은 것이 함정이다. 그만큼 게이 인구밀도도 떨어지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본인이 원하는 사람을 한 번 만나면 그 


사람과 오랜 기간 만남을 이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엔 게이가 너무 많다!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종로에서 게이를 만날 수 있다. 연애까지 진행시키고 진정한 사랑까지 나아가는 건 각자의 역량이라지만 


그런 역량은 둘째치고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다.’라는 가능성의 씨앗은 시시때때로 자라난다.


둘째로, 여긴 헬조선이다. 필자 나이 또래의 학생들은 그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삼포에 오포, 심지어는 구포 세대까지 나오는 판에 진정한 사랑은 젊은이에게 있어 사치 중의 사치가 아니던가! 


결혼을 완수해야 할 목표로 삼는 일반들과는 다르게 일찌감치 국가에 의해 결혼을 ‘포기 당한’ 우리라지만, 그만큼 


각자도생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만만치 않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린 결코 순진하지 않다. 진지한 연애였든 아니었든, 그게 깊이 팬 상처였든 아니었든.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이 변해왔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던지고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그 엄청난 초능력을 


우리는 언제부턴가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썸남 1호는 이래서 싫고 썸남 2호는 다 좋은데 이게 별로다. 좋게 말하면 


이제 사람 보는 눈이 생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제넘게 까다로워졌다. 내가 까다롭게 썸남을 보는 만큼 썸남도 


날 그렇게 보고 있으니 될 것도 안 된다.


그래.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거 다 변명이다. ‘진짜 사랑’ 혹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허상을 아직도 놓지 못한 


우리네들의 보호 기제 말이다. 한국은 별 탈 없는 이상 앞으로 쭉 지도 상의 손톱만한 나라일 것이고, 앞으로 


우리네 인생은 몇십 년간 더 바빠질 일만 남았다. 썸남 1호의 이러이러한 단점 때문에 그에게서 돌아선다는 건 


결국 더 나은 사람, 내게 꼭 맞는 사람이 어딘가 있을 거라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 아닌가? 말로는 ‘이제 난 사랑을 


믿지 않아.’라고 단호히 선언했는지는 몰라도 사실 그 환상을 완전히 놓지 못한 것이다.


감히 지껄이는 소리지만, 세상에 운명 같은 사랑은 없다. 운명 같은 착각이 있을 뿐. 오래가는 관계를 원한다면 


사랑은 순간적으로 뇌관을 스치는, 불꽃과도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곰국 같이 우러나는 진한 노력과 


존중이어야 한다.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은 ‘이 사람보다 더 좋을 또 다른 사람’이 아니라,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조금 더 오래, 차분히, 상대를 지켜볼 줄 아는 성숙함과 인내심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세상 모든 남자를 정복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졌다 해도 말리지 않겠다. 나는 그것도 한 


종류의 사랑이라고 본다. 하지만 당신이 LTR을 꿈꾸고 있다면, 우리 조금 더 차분해 보자. 끈질겨 보자. 혹시 


아는가. 차분히 서로를 지켜보는 어느 사이에, 서로에게 닳고 닳아서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꼭 맞는 연인이 되어 


있을지 말이다.


만 게이에게 결연히 고한다. 사랑하며 살지어다!